독립운동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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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거리 소개

독립운동가의 거리
독립운동가의 거리
독립운동가의 거리
독립운동가의 거리

독립운동가의 거리는

독립운동가의 거리는 2019년 홍예공원 내에 충남의 대표 독립운동가의 조형물을 설치하여 자연스럽게 독립 정신의 의미를 되새기고 조형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하였습니다.

태극기를 모티브로 한 상징적인 공간계획을 통해서 3・1운동 10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환기하고, 태극의 길과 도 대표 독립운동가 5인의 조형물로 구성하여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자주독립의 의미와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는 역사 교육 명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유관순 동상

우직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바람에 휘날리는 치맛자락과 옷고름 표현

나이 18세(3.1운동 당시 나이)
복식 1900~1970년대는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 등 역사적 격동을 경험했고,
전통한복 세대와 개량한복세대가 공존하고 일상복으로 한복을 착용했다.
바닥 사발통문을 모티브로 사발을 엎어서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이름을 둘러가며 적은 통문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다.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재학 중 3·1운동을 맞은 유관순은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였다.
귀향한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柳重權)·숙부 유중무(劉仲武)를 비롯해 조인원(趙麟元) 등과 함께 4월 1일 장날을 이용해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는 3월 31일 사전계획에 따라 매봉산 정상에서 다음날 만세시위가 전개될 것을 알리기 위해 횃불을 올리고,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병천주재소의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저지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헌병의 발포로 순국자가 발생하였다. 그는 군중들과 함께 병천주재소에서 일제의 만행에 항의하고, 헌병들의 무력적 진압에 맞서 격렬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로 인해 그의 부친인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를 비롯해 10여 명의 순국자가 발생하고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여 명이 체포를 당했다. 그는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국내 항일 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5 대전.충남 독립운동사적지』, 2009.

이동녕 동상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주석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하신 이동녕선생을 표현

나이 60세(임시정부 당시 나이)
복식 일제의 탄압과 일제의 중국 침략에 근거지를 상해에서 중국 내륙으로 이동 당시 복장
업적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등과 상동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다.1907년 귀국, 안창호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은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며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서 전덕기·양기탁·신채호·조성환 등과 청년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 파기를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2개월 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안창호·이회영과 함께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는 동시에 대성학교·오산학교 설립에 기여하고, 상동학교 교사로도 재직하여 민족교육운동에 매진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에서 이회영·이상룡 등과 경학사를 만들어 민생안정과 교육진흥에 주력하였다. 또한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이 되어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1912년 신흥강습소를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발전시켰다.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후 이상설·이동휘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는 동시에 「대동신문」 · 「해조신문」을 발행하였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장과 함께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다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으로 취임하고, 이후 국무령·법무총장을 역임하다가 1927년 주석이 되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30년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했고, 1930년과 1935년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1940년 사망 전까지 임시정부와 함께 하였다. 1940년 3월 중국 사천성에서 지병인 천식이 악화,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국내 항일 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5 대전.충남 독립운동사적지』, 2009.

한용운 동상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이었던 한용운 선생을 표현
상징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손에 들고 있게 표현

나이 47세(님의 침묵 발표할 당시 나이)
복식 독립운동가 겸 시인, 승려로써 개량한복 위에 우리나라 고유의 겉옷을 착용
업적 일제강점기 때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충남 결성에서 태어나 1905년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1913년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부산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했으며, 1916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하여 대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24일부터 27일 사이 승려 백용성(白龍城)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27일 최린의 집에서 민족대표로 서명하였다. 3월 1일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어 크게 기쁘며 더욱 더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계속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저항문학 활동을 하였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전환해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 전념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윤봉길 동상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에 집어 던지기 직전 상황 표현

나이 25세 (의거 당시 나이)
복식 의거 당시 양복과 스프링코트 착용
업적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윤봉길(尹奉吉,1908~1932)은 1908년 6월 21일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봉길은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禹儀)이며, 아호는 매헌(梅軒)이다.

윤봉길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수학했다.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하던 윤봉길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嫁生不換)’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상해행에 올랐다.

1932년 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그해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천장절과 일본군 상해점령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 가와바타[河端貞次]상해 일본인 거류민단장 등을 즉사시키는 의거를 거행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형무소 시외의 미츠코지 육군작업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좌진 동상

청산리대첩때 당시 부대를 지위하던 사령관의 모습으로 총을 들고 있는 강한 모습을 표현

나이 31세(청산리 전쟁 당시 나이)
복식 청산리 전투의 시기인 겨울 복장 착용
업적 한국의 독립운동가 1920년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가노(家奴)를 해방했으며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해 신교육운동을 전념했다. 1907년경 서울로 상경한 후 신민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기호흥학회·대한협회등에 참여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국망 후 독립자금 모집 중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광복회에 참여해 자금모집에 전념했으며, 1917년 광복회 만주부사령으로 파견되었다.

김좌진은 1918년 길림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 참여하면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1919년 3월 중순 길림군정사를 조직하고, 같은 해 서일(徐一)의 연합제의에 따라 대한군정서에 참여했다. 대한군정서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서대파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김좌진은 대한군정서군을 이끌고 1920년 10월 백운평·천수평·어랑촌 전투 등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청산리전투 이후에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1925년 북만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해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신민부 총사령관 및 군사부위원장으로 군사부문의 책임을 맡아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29년 7월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산시에서 고려공산당원이 쏜 흉탄에 순국했다.